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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즐거우면 돼요"…20주년 맞은 장애인 사물놀이패 '땀띠'"장애요? 저희는 그저 즐거운 음악을 추구할 뿐이에요." 중증 장애를 가진 4명의 청년으로 구성된 사물놀이패 '땀띠'가 창단 20주년을 맞아 '땀띠 날다 20년'이라는 제목으로 기념 공연을 준비 중이다. '땀띠'는 2003년 자폐성 장애를 가진 고태욱·박준호 씨와 뇌병변장애인 이석현 씨, 지적장애인 조형곤 씨 등 4명이 장애인 음악치료 프로그램 일환으로 모였다가 시작한 음악단체다. 신체적 한계 탓에 정교한 연주가 필요한 관악기나 건반악기 대신 타악기 위주인 사물놀이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9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린 창단 20주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석현 씨는 "초기에는 악보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선생님들이 연주를 해주면 그걸 그대로 외워서 연주했다"면서 "연습을 반복하면서 기억하는 과정이 필요해 비장애인보다 5배의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2004년 전국장애인풍물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자신감을 얻은 '땀띠' 멤버들은 설장구와 봉산탈춤, 이매춤, 열두발상모놀음 등을 익히며 본격적인 사물놀이패 활동을 이어갔다. 더딘 배움 속도에도 포기하지 않는 멤버 4명의 땀이 이룬 성과였다. 이석현 씨는 "첫 대회에 출전하려고 한여름에 컨테이너 가건물에서 합숙하며 연습했는데 모두에게 땀띠가 생겨 팀 이름을 '땀띠'로 지었다"면서 "음악치료로 끝날 줄 알았던 땀띠가 1년 만에 제대로 된 사물놀이패로 거듭났다"고 회상했다. 2012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처음으로 창작국악곡 다섯 곡을 담은 음반을 발매하면서 '땀띠'는 두 번째 변곡점을 맞이했다. 이석현 씨는 "창작 음반 발매 후 전통국악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악기 연주로 우리 음악의 장을 넓혀갔다"며 "다양한 악기에 국악의 리듬을 첨가해 우리만의 음악적 장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멤버 4명이 각자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이 만나 연주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연습을 하는 다른 음악단체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지만, '땀띠' 멤버들은 이러한 자율성이 팀을 20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꼽는다. 이석현 씨는 "서로의 일과 시간,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면서도 공연과 연습 시간이 정해지면 멤버들 모두 잘 지키려고 한다"며 "서로의 삶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 땀띠 활동을 녹여낸 것이 꾸준함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20년을 넘어 30주년, 4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단체로 남고 싶다는 '땀띠' 멤버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음악은 무엇일까. 기자의 뻔한 질문에 정곡을 찌르는 답변이 나왔다. 이석현 씨는 "즐거운 음악을 할 때 비로소 멤버 4명의 표정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며 "장애인으로 이뤄진 음악단체로서 진중한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겠지만 그저 즐거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땀띠' 창단 20주년 기념공연은 오는 31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국내 공연문화의 산실인 국립극장에서 진행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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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절창 정선아리랑!’# ‘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공연이 지난 4월 26일 삼성동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렸다. 20대에서 60대까지의 제자들 20명과 5명의 반주자와 함께 경기잡가, 경기민요, 강원도민요, 아리랑모음, 이렇게 4개 종목 13곡을 선보였다. ‘2024 국가무형문화유산 전승지원 기획공연인 만큼 경기12잡가 중 선유가·제비가·영변가 3곡은 일종의 보유자가 계승해야 하는 의무 곡인 셈이고, 나머지 경기민요를 비롯한 강원도 민요와 아리랑 모음곡은 제자들의 전승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선곡인 듯하다. 이 중에 이호연 보유자와 전승자들이 함께 전해준 소리는 12잡가 중의 '선유가'와 '영변가', 그리고 경기민요 '노랫가락'이다. 그리고 보유자가 독창으로 부른 것은 12잡가의 하나인 제비가와 강원도민요 정선아리랑·한오백년·강원도아리랑, 이렇게 4곡이었다. 이 중에 관객의 반응이나 보유자의 목성대로 구사하여 자신도 만족스로운 표정을 보여준 것은 단연 '정선아리랑'이었다. 이 정선아리랑은 보유자의 10여 종에 이르는 음반 대부분에 수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공연에서도 빼놓지 않는 곡이기도 하다. # 정선아리랑은 대체로 경기민요 소리꾼들이 선호하는 곡이다.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도 명창부가 선택하는 대표적 소리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를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잘 부르는 소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시인 신경림 선생의 다음과 같은 감상평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내게는 노래이기 이전에 내 정서의 깊은 샘”이라고 했다. 곧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는 소리로서, 이 정서를 표현해 내지 못하면 ’정선아리랑‘이 아니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유튜브 매체를 통해 한 서양음악 전공가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독일과 유럽에서 30여 년 서양 고전음악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듣고 한참을 운 적이 있다.”라고 한 것이 그렇다. ‘김옥심의 정선아리랑’, 이 소리는 한국전쟁 말기 당시는 강원도였던 이천 지역에서 있었던 ‘육군예대’(성경린 단장) 공연에 갔다가 ‘정선 아라리’를 듣은 이창배 선생과 김옥심 선생이 돌아와 다시 짜 불러 알려진 소리이다. 이런 탄생 배경은 생전 이창배 선생의 후원자였던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 ‘종로 국악로 지킴이 김뻑국 선생’의 증언이 있고, 명고(名鼓) 장덕화 선생이 김옥심 선생과 친했던 명창 이은주 선생에게서 직접 들었다며 필자에게 전한 말로는 거의 일치한다. 이런 연유에서 음반을 통해 확인되는 정선아리랑은 네 가지 버젼이 존재한다. 전주(前奏)와 간주(間奏)의 유무, 대표사설을 "강원도 금강산~”으로 한 것과 "네 칠자나 내 팔자나~”로 한 것 등이 있기 때문이다. ‘김옥심제 정선아리랑’이라고도 하고 ‘경기제(서울제) 정선아리랑’이라고도 명칭을 하는 이유인 것이다. 절창(絶唱), 이 말은 ‘다시 없는 명창’ 또는 ‘비할 데 없는 뛰어난 노래’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빼어난 노래이기도 하고, 빼어난 명창을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선아리랑은 절창이다”나 "김옥심은 절창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흔히 김옥심을 ‘하늘이 내린 소리’(La Voix Celeste) 또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명창’이라고 한다. 특히 그 목을 말하면서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같은 표현은 거의 ‘정선아리랑’을 말할 때 동반되는 수식어이다. 그래서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절창이라는데 이의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단견으로는 동시대 명창들 간의 경기민요 절창은 이렇게 본다. 묵계월은 ‘한오백년’(CD 경기민요의 향연), 안비취는 ‘이별가’, 이은주는 ‘긴아리랑’, 김옥심은 ‘정선아리랑’(오아시스 레코드 1476 경기민요 2집)이라고 본다. 이 네 분의 경기민요 4곡은 가히 다른 소리꾼들이 그 정서를 그만큼 표현해 내기는 쉽지 않을듯싶다.(그 원인의 하나로는 이들 소리가 성창(盛唱)된 시기로 보아 한국전쟁의 민족적 수난이란 정서가 반영된 것을 들기도 한다.) # ‘2024 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이호연도 정선아리랑도 절창이다. 이호연의 활동 이력이나 수상 경력은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다. 그러나 그가 해낸 공연과 음반 취입과 방송 출연 레파토리 이력을 꼽아보면 알 수 있다. 매우 실험적이었고, 파격적이기도 했다. 공연으로는 1999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통일의 소리 옥피리’ 초연을 들 수 있다. 이 공연 메세지는 야심찬 ‘밀레니엄 프로젝트-’한국의 소리가 바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공 종목으로 전체 국악판을 견인하겠다는 뱃심은 경기 소리꾼으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음반 발매로는 2015년 발매한 광복 70년 주년 기념 발매 ‘통일아리랑’이 있다. 리딩통월드 오케스트라와 어린이 합창단을 동원한 음반이다. 이는 ‘분단 70년 남북 이산가족 예술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공연으로 전환해 4년간이나 지역 순회공연을 한 원천이었다. 국악인으로서 민족문제를 자신의 소리 주제로 반영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창작 작품을 취입, 발매하는 기획력이나 경제적 여유만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나름의 시대정신과 소명의식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어 2008년 취입, 발매에 이은 ‘이호연 唱 경기12잡가’ 음반과 악보집을 2021년에 내놓았다. 경기민요 전승 능력과 전수 활동의 최종 결정체를 내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경기 12잡가 전승자로서의 의무감과 그간의 전수활동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있다. "우리 세대의 역할이 무형문화재 1세대 스승님들의 예능 원형을 보존, 계승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육 과정에서 갖춘 지식을 기반으로 앞 세대에서 보존, 계승한 원형을 연구해 경기소리의 유래와 유형을 밝혀 학문으로서 정립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음반과 악보집의 신뢰를 담보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드디어 그 화려한 이력의 종결판을 확보했다. 지난해 국가무형유산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사실을 말한다. "국가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종목의 전승능력,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의 탁월”함을 인정받은 결과이다. 1968년 이창배, 정득만 선생 사사와 1970년 안비취 선생 경기민요 전수, 1984년 제1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민요부문 장원으로 기량을 인정받고 활동. 다소 늦은 67세에 보유자 인정을 받았지만, 그래서 더 빛을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민속극장 ‘풍류’에서의 ‘이호연 경기소리 숨’ 공연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해설이 다소 밋밋했고, 음향이 너무 커서 앞자리에서 듣기에 불편한 정도 외에는 그렇다. 그러나 이 무대를 더욱 빛내준 것은 단연 보유자의 독창 ‘정선아리랑’이다. 이 소리는 1979년 한국음반의 ‘한국고전민요 제3집’(안비취 이은주 묵계월 3인 녹음)까지의 전주 형태 버젼이다. 1995년부터 연주되는 목탁소리와 합창의 인트로 버젼이 아니다. 이 버젼은 처음부터 감정을 고조시켜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은데, 원래의 버젼은 후렴을 먼저 부르고 "강원도 금강산~”으로 시작하여 온전히 정서를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버젼이다. 보유자의 이번 정선아리랑은 원래의 버젼 그대로이다. 보유자가 부른 정선아리랑은 두 번째의 독창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중반쯤의 무대로 관객들의 호응은 준비된 상태였다. 여유와 관록이 배인 자태였다. 첫 음도 그렇고 전체적 요성(搖聲)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고음이 보유자의 특징으로 매우 청아했다. 사설의 해석도 담담하여 오히려 전달이 쉬웠다. 보유자에게 따르는 목성 평가, '청아 담백'이 충분히 전달된 정선아리랑 무대였다. 절창, 이호연, 그리고 정선아리랑! 그 여음이 오래갈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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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겨울방학 틴틴창극교실 성료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겨울방학 기간 동안 진행된 '틴틴창극교실’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음을 발표했다. ‘틴틴창극교실’은 어린이들이 창극과 판소리를 배우며 직접 무대에서 공연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창의적인 국악 교육 프로그램이다. 겨울방학 프로그램은 5: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1월 4일부터 시작되어 1월 20일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열린 수료발표회로 화려하게 마무리하였다. 참가한 학생들은 전통 창극 '별주부전'의 주요 장면과 전래놀이를 통해 창극에 대한 심도 깊은 학습을 진행했다.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 창의력과 협동심을 길러주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는 각자의 자신감과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빛났다. 올해 여름에도 '틴틴창극교실'을 진행할 계획이다. 여름방학 프로그램은 '판소리 5바탕' 중 한 가지를 주제로 선정하여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더 자세한 사항은 추후에 공개될 예정이다. 김중현 원장은 "'틴틴창극교실'은 전통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창의적인 예술 교육을 통해 어린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전통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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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성 "저는 뮤지컬에 미친 사람…군대 휴가 나와 오디션 봤죠"(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저는 뮤지컬에 미쳐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뮤지컬로 시작해서 뮤지컬로 끝나죠. '몬테크리스토'를 너무 좋아해서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오디션을 보기도 했습니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 출연 중인 배우 고은성(34)이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EMK뮤지컬컴퍼니 사옥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작품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는 "'몬테크리스토'는 20대 초반부터 좋아한 작품이라 언젠가 배역을 맡을 것이라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며 "작품을 오래 준비했기에 이야기와 매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14년간 감옥에 갇혔던 선원 에드몬드의 복수와 용서를 그린다. 이번 시즌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원작 소설에 가깝게 설정을 바꾸고, 인물의 다층적인 면이 더 드러나도록 복수에서 용서로 이어지는 감정선을 보강했다. 고은성은 "복수하고, 용서하고, 끝나는 단순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지만 과정이 복잡하다"며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복수를 하다 어느 순간 용서를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했다. 복수에 미쳐서 남을 용서하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작품과 에드몬드라는 인물에 관한 자신만의 해석도 함께 들려줬다. "'몬테크리스토'는 에드몬드라는 선원이 인간이라는 파도를 만나 항해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바다 위에서는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처럼 능숙한 사람이지만, 인간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뒤 어려움을 다시 극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고은성은 지난해 11월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여섯 번째 시즌에 주인공 에드몬드 역으로 합류했다. 2010년 초연한 '몬테크리스토'는 이번 시즌 고은성을 비롯해 새로운 배우에게 주인공 역을 맡겼고, 작품의 줄거리와 넘버 등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군 복무 중 10주년 기념 공연의 오디션을 보러 갈 정도로 익숙하고 애정을 품은 작품을 새로운 환경에서 준비하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은성은 완전히 새롭게 작품을 만드는 일이 오히려 즐거웠다고 돌아봤다. 그는 "출연했던 배우가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며 "새로운 캐릭터를 분석하고, 캐릭터의 의도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움직임을 만들며 최선을 찾아갔다"고 설명했다. 작품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14년간 감옥에 갇혔던 선원 에드몬드의 복수와 용서를 그린다. 이번 시즌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원작 소설에 가깝게 설정을 바꾸고, 인물의 다층적인 면이 더 드러나도록 복수에서 용서로 이어지는 감정선을 보강했다. 고은성은 "복수하고, 용서하고, 끝나는 단순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지만 과정이 복잡하다"며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복수를 하다 어느 순간 용서를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했다. 복수에 미쳐서 남을 용서하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작품과 에드몬드라는 인물에 관한 자신만의 해석도 함께 들려줬다. "'몬테크리스토'는 에드몬드라는 선원이 인간이라는 파도를 만나 항해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바다 위에서는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처럼 능숙한 사람이지만, 인간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뒤 어려움을 다시 극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고은성은 2011년 데뷔한 이래 조연을 거쳐 '헤드윅', '데스노트' 등 대극장 작품에서 주연을 맡는 배우로 성장했다. 18살 때 아무런 기대 없이 억지로 끌려가 감상했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고, 그 후로 고은성은 오로지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 그는 "저는 뮤지컬의 간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며 "극적인 상황과 뮤지컬 특유의 감수성이 저를 뮤지컬에 미치게 만든다. 뮤지컬이 저를 늘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뮤지컬에 미쳐있는' 그는 무대의 본질에 벗어난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뮤지컬에 출연하며 이겨낸 뒤로는 어떤 일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는 에너지까지 갖추게 됐다. 고은성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맡은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것이고, 하루하루 공연을 잘 풀어내는 것"이라며 "관객의 함성도 내가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관객이 주는 감사함을 알되, 감사를 위해 살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올해 목표 역시 흥행과 관계없이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과거에 출연한 작품이 있으니 지금이 있고, 지금이 있어서 또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준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활동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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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진흥법 제정’, 자부심 만발국악진흥법 제정 주체임을 자임하며 시행령 마련과 시행을 주도한다는 주인의식으로 출범한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이 구심력을 갖추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기념공연을 개최했다. 31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에 걸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1 종목 99명 회원들이 꾸민 무대였다. 1부(김세종)와 2부(이수현) 사회자의 맨트는 물론, 축사자나 출연자들이 표명한 멧시지는 분명했다. 국악진흥법 마련과 그 통과에 대한 자부심과 이의 시행안 마련과 시행에 대한 주도권을 갖는다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국악진흥법 시행의 4축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부, 국악기관(국립국악원/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국악방송), 그리고 동력을 추동한 국악인들. 이 중 국회에서 임오경 의원이, 국립국악원의 김영운 원장이 참석하여 이를 분명히 하였다. 법안 대표 발의자인 임오경 의원은 "임웅수 감독의 강력한 호소에 동의하여 2005년 처음 ‘전통문화의 보존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 입법된 것으로부터 7차례의 입법과 폐기를 반복하던 법안을 제가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하여 18년만에 통과를 시켰다”고 하였다. 김영운 원장은 "국악의 힘을 지탱할 법률적 기반이 없어 아쉽던 차에 국악진흥법이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에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화답인듯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 이영희 이사장은 "국악진흥법 제정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뜻에서 준비된 이번 공연을 기점으로 구심력을 갖추고 기쁨 넘치는 국악계”가 되자고 하였다. 출연자인 사물놀이 이광수, 신영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김청만 판소리 고법 보유자, 이호연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등은 물론, 객석에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과 이생강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등이 이상에 대해 동의를 표하였다. 한편 국악진흥법 제정 목적에는 "국악을 보전ㆍ계승하고 이를 육성ㆍ진흥하며 국악문화산업을 활성화 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 기관은 국악의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지원 대책과 국악 정책을 마련하고, 시민단체는 그 역할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그 대안 마련을 해야 한다. 주체 측은 이번 공연에서 내 비친 자부심 만큼, 그 역할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점검하여 시행령 마련에 진력을 다하는 계기여야 한다. 특히 ‘국악의 날’ 제정에 대해서도 국악인들의 공감을 얻어 제정해야 한다. 초년 기자에게도 공연 주최 측의 멧시지가 선명하게 전달되어 국악진흥법 시행으로 달라진 국악계의 모습이 크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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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인재들 첫 비상! 'K-어린이연희단' 예비반 수료식지난 9일(토), 국립부산국악원(원장 이정엽) 국악체험관 5층에서 <K-어린이연희단> 예비반 수료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번 수료식은 영남 지역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통 국악 교육 프로그램의 성과를 기념하는 자리였다. 국립부산국악원은 2023년 9월 16일부터 12월 9일까지 매주 토요일, 국악체험관에서 <K-어린이연희단> 예비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설장구, 춤, 노래, 연희 등 다양한 국악 요소를 교육하여 어린이들의 자기표현 능력과 자신감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수료식은 예비반 수료 발표회, 축하 공연, 수료증 전달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어린이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며 화려한 발표를 선사했다. 국립부산국악원 이정엽 원장은 "이번 <K-어린이연희단> 예비반의 운영을 통해 어린이들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고 전통연희의 즐거움과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어린이들이 국악을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우리 어린이들이 전통문화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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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파주 우리소리전국국악대제전(12/10)『 제11회 파주 우리소리 전국 국악대제전 』은 전통문화의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여 육성하고, 우리 전통국악을 실전에서 경험하고 소외된 국악인들에게 경연대회를 통하여 자신감 성취 및 타 장르 교류를 통해 학습기회를 마련하여 자긍심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함. ■행사명:제11회 파주 우리소리 전국 국악대제전 ■일 시: 2023년 12월 10일(일) 09:00~16:00 경연 16:00~16:30 축하공연 16:30~17:00 시상식 ■장 소: 파주시민회관 소공연장 (경기 파주시 시민회관길 33) ■주 최 /주 관 : (사)우리소리보존회 파주지부 ■후 원: 파주시, 파주시의회, 파주문화원, (사)한국예총 파주시지회, (사)우리소리보존회, 풀빛출판사, 평화어울무용단 ■경연내용 ■성 악 : 판소리, 병창, 민요, 가곡, 가사, 시조 ■기 악 : 국악기 전 분야 ■타 악 : 개인 및 단체 ( 4인 이상 ) ■무 용 : 한국무용 ( 전통 및 창작 ) ■경연시간 : 개인 - 3분 이내 / 단체 –8분 이내 ( * 참가자가 많은 경우 단축될 수도 있음 ) ■참가대상 :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 ■일반부 (19세이상) ■학생부 ( 초등부 / 중등부 / 고등부 ) < ※ 참가자는 필히 한복(공연복)을 착용해야 함 > ■참가신청 ○ 접수기간 : 2023년 11월 27일 (월) ~ 2023년 12월 9일 (토) 까지 ○ 접수방법 : 온라인접수 - E Mail : pajusorichum@naver.com ○ 신청서 다운로드 : 붙임, 국악신문사 대회방 ○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 1부 ○ 참 가 비 : 없음 ○ 고 수 비 : 50,000원 (미 대동 시) - 계좌번호 : 농협 356-0951-9303-23 / 예금주 : 김정희 ■심 사 ○ 운영(심사)규정 - 참가 자격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일반인, 청소년, 단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단 본 대회 및 타 대회 장관상 이상 수상한자는 참가할 수 없다) - 본 대회 참가신청은 일 부문에 한해 신청이 가능하며 소정 양식에 준한다. - 각 부문 경연순서는 공개추첨을 하되 대회 진행편의상 집행부에서 임의로순서를정할 수 있다. - 본 대회 경연자는 경연순서를 준수하여 경연을 진행하되, 집행부가 인정하는 부득 이한 경우가 발생한 경우 다른 경연자의 동의를 받은 후 경연순서를 바꿀 수 있다. - 반주자는 대동을 원칙으로 하되 고수를 동반 못할 경우 집행부에서 지정한 고수로 선택할 수 있다. ○ 심사회피제도 - 참가자는 직접 스승이나 8촌 이내 친인척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할 때에는 해당심사 위원의 심사 회피를 신청해야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아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었음이 발견될 시에는 본 대회 주최, 주관단체는 수상취소를 결 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해당상장을 반환해야한다. 참가자는 이 조항을 수락하고 참가하는 것에 동의 하여야한다. ■기 타 ○ 입상자로서 결격사유가 발견될 경우 입상자격 취소 ○ 지정고수가 필요할 경우 참가신청서에 명기○ 본 대회요강 및 시상내역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시상내역 ○ 일반부 시상부문 훈 격 인 원 비 고 대 상 파주시장상 1팀 300,000원 최우수상 파주국회의원상 1팀 200,000원 우 수 상 파주시의회의장상 2팀 100,000원 장 려 상 파주문화원장상 3팀 상 장 특 별 상 파주국회의원상 4팀 상 장 ○ 학생부 시상부문 훈 격 인 원 비 고 대 상 파주시장상 고등부 1팀 상 장 최우수상 파주국회의원상 초등부 중등부 각 1팀 고등부 상 장 우 수 상 (사)파주예총회장상 초등부 중등부 각 2팀 고등부 상 장 장 려 상 (사)우리소리보존회 이사장상 초등부 중등부 각 3팀 고등부 상 장 ■문 의 ○ (사)우리소리보존회 파주지부 010-4830-0937 / 010-3731-3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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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노래 '부용산'이다. 박기동이 노랫말을 쓰고 안성현이 지었다. 안치환과 윤선애가 불러 세간에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지난해 본 지면을 통해 '산동애가'를 다루면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부용산 가사를 빼닮은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카피를 붙였던 이유가 있다.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했던 굴절의 역사,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 행간에 겹겹이 쌓인 질곡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월북이란 오명을 달고 있는 안성현이 있고 좌익이라는 딱지를 달고 평생 감시 속에서 살았던 박기동이 있다. 박기동은 천재 문학소녀를 위해 초빙될 만큼 출중한 문학인이었다. 안성현은 가야금산조의 중흥조라고 하는 안기옥의 아들이기도 하다. 훗날 박기동은 <부용산>이라는 책을 냈다. 나주문화원에서는 <안성현 백서>를 출간했다. <백서>에 의하면, 김 종 시인 등 숱한 연구자들에 의해 광폭의 추적과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누이와 제자의 죽음을 애달파했던 상여소리 제망매가(祭亡妹歌) "죽고 사는 길이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 우리 향가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다. 누이의 죽음을 다룬 노래여서 '위망매영재가'라고도 한다. 양주동이 해석을 하였는데, 연구자들에 따라 약간씩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월명사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제사하였더니),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지전(紙錢)이 서쪽으로 날아가 없어졌다. 하늘을 감응하게 하고 귀신을 감복시켰다는 향가의 주술력을 말하는 것이다. 박기동의 <부용산>에서도 향가의 전통을 승계한 숨결들이 포착된다. 한 가지에서 난 잎들이 가을 낙엽이 되어 떨어지나 우리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누이는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마치 낙엽처럼 날아가 버린다. 월명사는 미타찰(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 곧 종교적 초월을 빌어 누이와의 재회를 염원하는데 박기동은 부용산 봉우리 휘감아 도는 바람결을 통해 누이의 흔적을 좇는다. 안성현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이 심상에 포개어 마치 남도의 만가(輓歌)같은 선율을 직조해 낸다. 어디 이것이 노래에 그치겠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월명사의 낙엽이기도 하고 벌교 부용산 봉우리를 맴도는 바람결 자체이거늘. 금지곡 <부용산>은 오래도록 우리 곁을 떠나있었다. 민족동란 전후기에 월북하거나 이른바 산사람이 된 이들이 많고 그들에 의해 많이 불리었기 때문에 문제 삼았던 것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부용산>을 소환하는 것, 안성현의 월북은 월북대로 냉정하게 평가하되, 향가에서 김소월로 혹은 박기동으로, 고려가요에서 안성현의 선율로 이어지는 얼개는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굴절의 시기를 거치며 쌓은 우리의 내공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부용산>은 보다 널리 불릴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자신감이 교착된 남북의 물꼬를 트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부용산>은 남도의 육자배기다 박기동이 글을 짓고 안성현이 곡을 붙인 <부용산>은 한마디로 말하면 남도의 육자배기다. 육자배기의 전형적인 떨고 밀고 꺾는 선율로 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도전통의 시김새들이 새록새록 들어있다는 점도 그렇다. 죽음을 앞둔 빨치산들이 고향에 두고 온 누이며 부모며 형제자매들을 그리며 불렀던 한의 노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에서도 남도의 어느 옴팍진(오붓한) 다방에서 이 노래를 숨어 부르던 이들이 있었다. 좌익이라서가 아니라 이 노래 자체가 우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얼개나 음악적 결은 거슬러 올라 향가에 닿고 굽이쳐 올라 육자배기에 닿는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늘 그렇게 주장한다. 단조 즉 마이너 기반의 계면조가 <부용산>뿐만 <엄마야 누나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스며들어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요 <엄마야 누나야>는 김광수가 작곡한 것인데, 본래 안성현의 곡 <엄마야 누나야>는 전통음악 계면조 기반의 곡으로 사뭇 다르다. 가곡풍의 <부용산>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를 남도창법의 계승으로 풀이하지 않으면 법고창신의 큰 줄기를 놓치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엄마야 누나야>뿐만 아니라 김정호의 <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래들, 내가 이름 붙여둔 송가인이나 김태연의 '남도트로트' 창법에 이르기까지 <부용산>류의 법고창신에 대해서는 차차 고를 달리해 다루기로 하겠다. 오늘 막걸리 한잔 마시며 <부용산>을 불러봐야겠다. 1971년경 목포 예술인 공연 장면. 목포예총 제공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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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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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예술단, 판타지 춤극 '하회' 성황리에 성료8월 12일, 안동문화예술의전당 백조홀에서 안동 지역 설화를 담은 특별한 공연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타 지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객석을 채워주었다. 아리예술단의 전통예술 지역브랜드 세 번째 춤극인 '하회(河回)-신령한 탈 이야기'가 한국전통창작 판타지 춤극으로 선 보였다. 올해 처음으로 선 보이는 '하회(河回)-신령한 탈 이야기'는 '하회탈'의 설화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주인공 허 도령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하회(河回)-신령한 탈 이야기'은 하회탈전설의 주인공 허도령이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마을사람들을 구한다는 독창적 재해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특히, 춤과 극, 노래를 조합한 융복합 작품은 3차원적 융복합 공연으로 대본이 주는 독창적 이야기, 공연 음악 속 판소리, 대사와 노래가 주는 깊은 울림을 통해, 남녀노소 전 연령층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는 환타지 춤극이다. 허 도령은 신령한 나무로 첫 번째 탈을 만들기 시작하고 어둠의 신은 그를 방해하고 위협하지만 허도령은 흔들리지 않는다. 허 도령은 시간과 공간의 다차원 통로를 통해서 다른 시공간에 있는 각시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야. 난 가야해. 내가 가지 않으면 마을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내 몸의 눈이 흐려져도 내 영혼의 눈은 아직도 맑고 밝아.”(허도령) "너는 절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너는 절대로 신령한 탈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다차원 통로를 너는 절대로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어둠의 신) "아이야, 신령한 탈은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아이야, 신령한 탈은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이란다. 아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아니? 모든 생명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란다. 그들을 지켜주는 마음이란다. 아이야, 모두가 아름다운 빛의 마음을 지니면 신성한 힘이 생겨난단다. 아이야, 그러면 마을의 재앙은 사라질 것이다. 눈처럼 아름다운 아이야."(빛의 존재) 에필로그는 "마을 사람을 재앙에서부터 구하는 신령한 탈은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이란다"라는 메세지이다. 안동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이 말이 가슴에 울렸다. "이 세상을 살리는 길은 모든 사람이 함께 해야만 한다는 사실, 마음이 모여서 하나가 되야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린아이와 빛의 존재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은 신령한 탈을 완성시키고 재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두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축제가 펼쳐진다. 이윽고 막이 내린다. 우리 한민족의 전통 춤사위가 마치 뮤지컬처럼 펼쳐지면서 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은 춤사위에 연기력까지 70분 동안 무대를 판타지세계로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민간예술단체로 한국전통창작 춤극 작품을 주력으로 기획·제작·공연까지 해마다 작품을 선 보여 고품격 춤극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2011년 '불멸의 연인 논개', 2015년 '함께 아리랑', 2016년 '종천지애-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2020년 '燕이(연이)' 등 4개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50여 차례의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온 한 무용가는 "수준높은 컬리티 무용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출연진들이 연습을 충분히 했다는 자신감이 무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격려했다. 김나영 예술 총감독 단장은 "'전래되어 온 하회탈'의 전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춤극 작품이다. 세계적 고품격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연 제작에 임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탈춤'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고, 안동의 하회마을과 하회탈전설의 컨텐츠 작업을 통해 안동지역 관광 활성화에 기여할 수준 높은 공연관광 상품으로 제작해 하회탈의 설화를 안동의 지역브랜드로 마케팅하기 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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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할머니들의 매콤달콤한 이야기 서바이벌 최종회,18일‘오늘도 주인공’의 6070이야기예술인(이야기할머니)들이 실수를 연발하던 중간점검 평가 때와 180도 달리진 일취월장한 모습으로, 역대급 파이널 무대를 예고한다. 18일 저녁 7시 방송하는 tvN STORY ‘오늘도 주인공’ 최종회에서는 마지막 리허설과 함께 파이널 무대를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6070이야기예술인들(이야기할머니)의 모습이 펼쳐진다. 그동안 이야기예술인(이야기할머니)들은 ‘오늘도 주인공’ 오디션 참여 후, 최종 무대를 위해 한달 넘게 비지땀을 쏟아왔다. 특히 정영주 팀장의 뮤지컬 팀, 장동민 팀장의 국악 팀, 홍윤화 팀장의 넌버벌 팀, 육중완 팀장의 공연 팀은 최종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열정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중간점검에서 1위를 차지한 장동민 팀은 당시 ‘최종 공연 순서’를 정하는 베네핏을 부여받은 바 있는데, "공연 당일에 순서를 발표하겠다”고 해 모든 팀들을 ‘멘붕’에 빠트린다. 잠시 후, 각 팀은 공연 순서 확인에 나서고, 첫 번째 순서임을 알게 된 홍윤화 팀은,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라면서도 "안 되는 게 어디 있냐”라며 결의를 다진다. 대망의 파이널 무대에는 특별한 심사위원이 자리해 현장을 빛낸다. 개그우먼 이성미를 비롯해 만화 ‘달려라 하니’의 나애리와 ‘영심이’의 오영심을 목소리 연기한 성우 최수민, 뮤지컬 ‘아이다’와 ‘친정엄마’ 등을 연출한 김재성 감독, 그리고 한국국학진흥원 박경환 수석연구위원이 참석하는 것. 이와 함께 MC 박미선은 "오디션을 통해 합격한 총 16인의 도전자들이 융복합 이야기극을 준비해왔다. 오늘 최종 무대가 펼쳐진다”라고 소개해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이윽고, 홍윤화 팀장의 넌버벌 팀이 첫 공연을 선보인다. 이들은 ‘요건 내 떡’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극을 시작하는데, 특히 코미디 그룹 옹알스와 컬래버해, 재치 넘치는 퍼포먼스로 볼거리를 안긴다. 두 번째 순서로는 정영주 팀장의 뮤지컬 팀이 등장해, ‘냄새 값 소리 값’이라는 이야기극을 시작한다. 뒤이어 장동민 팀장의 국악팀과 육중완 팀장의 밴드 팀도 자신감 넘치는 무대를 선보여, 과연 네 개 팀 중 누가 최종 우승을 차지할지에 초미의 관심이 쏠린다. 제작진은 "6070이야기예술인(이야기할머니)들이 그간 열정을 쏟아 준비한 마지막 무대가 드디어 공개된다. 세대를 초월해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융복합 무대가 펼쳐질 것이다. 또한 깜짝 놀랄 만한 경연 결과가 짜릿한 재미를 선사할 것이니 마지막 회를 놓치지 않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오늘도 주인공'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작지원한 프로그램으로, 단순 복지 차원을 넘어 시니어 세대의 문화 참여 열망에 부응하고 노년층의 창작예술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문체부는 방송 이후에도 6070세대가 창작예술의 주역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최종 공연에서 선보인 이야기극을 각색하여, 올해 10월부터 전국 3개 내외의 주요 도시에서 약 10회 공연할 예정이다. 6070이야기예술인(이야기할머니)들의 매콤달콤한 이야기 서바이벌인 tvN STORY ‘오늘도 주인공’ 최종회는 18일(오늘) 저녁 7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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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전승 실상 快晴, ‘청출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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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전국장애인승달국악대전 대상을 수상한 임정은춤의 열정으로 넘어선 청각장애! 먼저 이렇게 큰 상을 주신 주최 측과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귀가 좋지 않아서 어린 나이 때부터 보청기를 착용하며 살아왔고 어린 나이에는 청각 장애인이라는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보청기를 끼고 있는 나의 모습을 사람들이 쳐다보는 그 자체가 너무나 싫었던 철없는 아이였습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해서 상대방이 짜증내거나 할 때마다 괜히 주눅 들고 자신감이 없어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를 크게 좋아하지 않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유독 방송댄스 춤 추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의 장애를 전혀 모르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부모님 몰래 춤추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방송댄스로는 대학을 진학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고 17살부터 한국무용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의 곁에서 지원해 주시고 응원해 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힘든 시간 속에서 버티고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가족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무용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딸이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멋지게 키워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든든하게 응원해 주는 남편과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도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무용인생 22년이라는 시간 동안 옆에서 좋은 가르침을 주신 서보근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저의 춤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자 축복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많이 존경합니다. 대회를 위해 애써주신 무안군수님, 무안 전국 승달장애인국악대제전 모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승달장애인국악대제전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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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명무, 호남살풀이춤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게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051026cholsun4.jpg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 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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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세지웅’이라!기자들이 수시로 내부망에 접속하는 곳이 ‘보도자료’ 코너이다. ‘보도자료’가 스톡크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본보의 경우 일 년 중에 4, 5월과 9, 10월에는 하루 40여건 정도가 접수된다. 주로 개인 발표회와 기획공연이 주이나 특별히 행정 기관의 사업 계획과 결과 발표가 더해지는 시기이다. 그래서 대개는 기자들이 직접 방문하여 출입처와 관련한 자료를 선택하나, 이 4달 동안에는 데스크가 기자에게 분류, 수시로 SNS를 통해 취재를 독촉하기도 한다. 금년에도 예외 없이 4월 중순에 들어 의뢰 건이 급증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 두세 번 정도 자료를 분류하여 담당 기자들에게 배당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눈에 뛰는 자료를 접하게 되고, 이에 대해서는 데스크에서 직접 살피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 눈에 든 것 중 하나가 ‘이시은 서도소리의 일세지웅을 소망하다’라는 발표회 자료이다. 사진으로는 앳된 여중생 정도가 4월 30일 서도소리 발표회를 갖는다며, 여기에 ‘일세지웅’이란 표현을 썼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겁기도 하고 엄중하기까지 한 고사성어를 쓴 것이다. 자칫 말의 기세에 짓눌릴 법도 하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一世之雄’이란 적어도 동시대에는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나 실적을 가진 인물임을 일컷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에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기 분야에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 부여하는 격찬이다. 뜻이 이러하니 의야한 마음으로 소녀 국악생의 발표 자료를 살펴봤다. 본인의 인사말 중에 이런 말이 보였다. "스승님의 소리 한 자락이라도 흉내라도 내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나아가 저만의 향기가 있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라고 했다. 이어서 "훗 날 一世之雄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하는 저를 사랑으로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도 했다. 이것으로 보면 분명 스스로가 미래의 위치를 말 한 것이다. 기특하고 당찬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스승이 누구일까?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제1회 동아주니어국악콩쿠르 중등부 성악 금상, 제25회 창원국악경연대회 중고등부 가야금병창 민요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 정도라면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질만하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살폈다. ‘축하의 글’이 있다. 글 쓴 이가 발표자의 스승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도 그 고사성어가 다시 쓰였다. "아직 어리지만 一世之雄, 이 시대에 최고의 명창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오늘의 무대를 만들어 내는 지은이가 그 큰 꿈을 이루기를 바라며~”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었다. "시은이의 서도소리 명창이 되기 위한 첫 걸음과 길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제자의 당찬 기세에 대한 스승의 믿음에 찬 격려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틀 후, 또 쌓이는 보도자료를 살피게 되었다. 그 중에 국악 최고 기관에서 의뢰한 자료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내용은 국악계 세 분야의 최고 권위자를 확정, 임명하였다는 소식이고, 그 중 한 분이 바로 격려의 글을 쓴 스승이었다. 이 분은 이런 결과로 보면 실제 ‘一世之雄’의 위업을 이룬 것이다. 과연 격려할만한 스승에, 당찬 제자임이 틀림없다. 동시대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의 재주와 실적을 가진 인물이, 역시 같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런 이치는 풍토로 정착하여 확대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분야의 ‘일세지웅’ 출현을 소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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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희국악예술단, '2023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 개최한다지난 4일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에서 '세계 차 엑스포'가 개막했다.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한달동안 개최된다. 하동군과 '손양희국악예술단'은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한다. 명칭은 '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05.11-12.)과 '하동세계차엑스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05.27.)을 개최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맡고 창원 지역을 비롯해 경상남도와 타 시도의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2009년부터 창원어린이국악단,'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단장과 지회장을 손양희 단장이 맡고 있다. 특히 25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25년 구독자인 손양희국악예술단의 활동과 전국국악경연대회 진행에 대해서 국악신문 기미양 객원기자가 손양희국악예술단 손양희단장을 한달동안 전화와 방문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 주) 손양희 국악예술단 설립목적과 전승활동 Q. 손양희 국악 예술단 설립 목적은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민족예술의 정수 국악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나아가 우리 음악을 이끌어갈 전문 국악인의 밑거름인 차세대 명창과 명인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언제 조직되었나요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창원에서 1996년 제1회 창원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를 주관하면서부터 조직되었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 소개해주세요.. 설립 목적, 전승활동, 회원수.전승활동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1995년 손양희국악교습소로 시작하여, 2007년 손양희국악예술단으로 거듭났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자체 기획공연과 시, 도, 국가 공모사업을 기본으로 실행하면서, 각 시군의 축제나 국가 공식 기념일 행사에 초청을 받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 미국, 유럽 등 20여개국 해외 순회공연을 하며 폭넓게 공연 활동을 하는 전문 국악공연단체이다. 또한 후진양성과 계승발전을 위해 규칙적인 전승교육 활동에도 30여 년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올해로 26회차가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인재 양성발굴에 핵심 사업 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전문예술단체이다. 회원은 100여 명과 예술단원은 25여 명이 활동한다 Q. 초대회장, 역대회장은? A. 초대 대회회장은 1996년 당시 창원국악협회장이셨던 故 박미숙선생을 필두로 노키아티엠씨 이재욱 회장, 공민배 전창원시장, 현, ㈜부경 김찬모회장으로 연결되어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고 계신다. 26년이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Q.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는 26회가 되는데, 언제부터 손양희 회장이 이어오고 계시나요 A.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창원 국악협회장의 별세로 존립의 기로에 선 국악경연대회를, 2년 지난 1998년 제2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25살밖에 안된 제가 맡아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작년 11월까지 제2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초반기 국악 불모지 창원에서 이 국악경연대회를 알리기 시작할 때,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Q.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 26년 돐을 맞이하는데, 자랑 좀 해주세요. A.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는 창원이 공업도시라, 예술 장르 특히 국악 분야는 아직도 열악한 편이다. 하여 고른 발전을 꾀하며 종합대회를 유치했다. 종합대상은 국회의장상이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도지사상, 창원시장상, 도교육감상, 시교육장상 등 판소리, 기악, 민요.가야금병창, 무용, 풍물... 5개부문을 각파트에 5분의 권위있는 심사위원을 모시며 투명한 대회를 만들어 왔다. 그 결과 문화관광부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평가에서 작년(2022년)은 B+ 등급과 그 3년 전에는 A등급을 받아 공명정대하고 내실있는 우수대회로 평가받았다. Q.최근 서울에서 하동차엑스포 알리기 행사를 했는데..오셨나요? 특별한 행사가 있었나요 A. 그날 행사가 이미 잡혀 있어서 참석못했다. 특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김 회장으로 유명한 국민배우 ‘국민 아버지’ 최불암 씨를 행사 중 2023하동세계차엑스포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뜻깊은 위촉식도 가졌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들었다. '2023하동차엑스포'와 '2023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명창대전' Q. '2023하동차엑스포' 소개해주세요. A.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 좋은 하동...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이지요.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2023하동세계차엑스포가 개최된다. Q. 전국에서 산수가 아름답가로 유명한 하동의 유래에 대해 자랑 좀 해주세요. A.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은 하동의 아름다움을 ‘호중별천(壺中別天)’으로 표현하며 ‘동쪽 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신선이 옥베개를 밀치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라고 극찬했다. 천년이 지난 오늘날 바로 세계적 차(茶)의 주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Q. 이번 손양희국악예술단에서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하는 국악경창대회 취지는 A. 2023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3 대한민국 명창대전'과 '2023 전국청소 년국악경연대회'을 개최한다. 이는 세계가 주목하는 엑스포장에는 신명나고도 우수한 우리 전통음악인 풍악이 빠질 수 없으므로, 단순한 경연대회가 아닌, 축하공연 같은 경연대회를 통해 우리음악의 신명, 전통성을 하동을 찾은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함으로 엑스포장을 더욱더 활기차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꾀한다. 손양희 명창 국악계 입문과 국악활동 Q.국악계 입문은 어떤 계기로 언제 들어오셨는지요. 스승은? A. 부산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3년에 한국무용에 입문하였고, 초등학생때부터 노래를 잘 부른다고 인정 받아, 합창부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한국무용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열심히 하였으나, 고2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유한 가세가 기울자, 9년 동안 받아온 무용교습은 포기해야 해서 절망적이였다. 그런데 그즈음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에서 판소리 무료 강습회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서 판소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판소리가 나를 다시 소생시켰다. 故 선동옥 선생님(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입문하여 지금껏 소릿꾼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故 선동옥(수궁가), 故 이명희(흥보가,춘향가), 故 한갑주(적벽가), 성준숙(심청가)선생님들께 이수를 받았다. 2008년 12월에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 9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조교로 지정되었다. Q.손양희 선생님 전국경연대회에서 상을 많이 타셨는데, 가장 큰 상을 받은 때는 언제인가요 A. 2017년 판소리 입문 32년만에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16회 대구 국악제에서 판소리 부문에 참가하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은후 12년만에 받은 상이다. 이때 가장 공력을 많이 들였을 때, 받은 상이다. Q. 창원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악단체로 손꼽히는 손양희국악예술단 자랑 좀 해주세요. A. 국악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의 학부 출신 또는 재학생을 회원이 많다. 그만큼 젊고 활력 넘치는 전문 국악단체이다.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김선희, 타악과 풍물로 전국 국악 경연 대회에서 종합 대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송기혁, 가야금 전공의 김수아 등이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부터 겨울방학 여름방학 기간 ‘2008 국악학교’를 개설하여 창원과 주변 국악인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지속해오고 있다. 그래서 창원은 물론 경남에서는 널리 알려진 국악단체이다. Q. 가장 뜻깊고 추억에 남는 공연은 A. 2003년 10월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이자 여류 문인으로 꼽히는 황진이를 소재로 한 창극 '황진이'를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국립 창극단 수석 단원 등 주요 출연진과 연출, 시나리오, 음악 등 주요 제작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주인공은 창원 지역의 소리꾼을 대표하여 제가 황진이 역을 맡았죠.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가 제작한 최초의 경상남도 지역 창극이었다. 2006년에는 창원 성산 아트홀 소극장에서 '제2회 손양희 판소리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창극 '토끼야 수궁가자' 에서 창원에서 연출자를 구하지 못해서 연출과 주인공을 맡았다. '황진이' 역과 '별주부'역을 맡은 때가 저희 소리에 대한 정열을 태웠던 시절인가 보다. 수궁가 완창발표회가 큰 동력이 되었다. 이후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Q. 기억에 남는 해외공연은 A. 2011년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왓에서 한국의 아리랑 콘서트’를 공연하였다. 우리가 갔던 곳은 캄보디아의 우리나라의 불교인 조계종이 세운 고아원 겸 보육시설 '아름다운나라'이다. 그해 여름 창원어린이국악단 14명의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지리산 산공부(합숙) 대신, 봉사 차원으로 15일 일정으로 갔다. 원장님은 조계종의 스님이셨고, 직원들도 한국분들이 고생하고 계시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우리는 캄보디아 학생들과 교류 및 캄보디아 학생들에게 풍물과 민요를 가르키며 함께 공부하고 신나게 뛰어 놀았다. 우리 창원어린이국악단 학생들이 신명나는 공연도 선보여주는 등 우리 전통음악의 우수성과 신명을 잘 전달하고 왔다. 이는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마음과 우리 국악의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게 했던 큰 계기로 기억된다. 양명창은 어려운 청년기, 국악에 입문하면서 판소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일찌기 20대 중반에 제2회 창원전국악경창대회를 맡으면서 국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구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명실공히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올랐다. 가무악에 타고난 재능으로 판소리·풍물·전통무용 등을 섭렵하고 공연 연출까지 해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초창기 2003년 뮤직컬 형식 창극 작품을 맡았지만 창원에서 국악 분야 연출자를 찾지 못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 Q. 하동 출신으로 유명한 국악인 누구신가요 A. 여러분이 계셨지만, 손꼽히는 두분을 소개합니다. 하동 악양에 '명창 유성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이 있는데, 유성준(1873~1949)명창은 판소리 근대 5대명창중의 ‘동편제의 제왕’으로 불리어졌으며, 하동 악양면 신대마을에서 활동하시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선유(1873~1949) 명창은 송우룡 명창과 김세종 명창에게 사사했고, 최초로 판소리 다섯마당 창본 '오가전집'을 펴냈으며 진주권번의 소리사범으로 활동하셨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두 분의 명창이 하동을 기점으로 폭넓게 활동을 하셨고, 이 두 분을 기리는 판소리 기념관이 하동 악약면 있으며, 판소리 전승발전을 위해 중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Q.그동안 창원에서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A. 첫째로는 판소리를 30여년간 후학을 가르키며 차세대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자체 기획공연 및 타 지역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이 공연과 시, 도, 국가의 다양한 공모사 업 지원 및 선정으로 경남을 비롯하여 국내외 등 수 많은 순회공연을 하였고, 26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며 인재 발굴과 대중화에 힘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Q. 가장 좋아하시는 민요는 A. 우리의 민요는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육자백이', '흥타령'을 특히 좋아한다. 구성지면서 질펀한 우리네 삶이 녹아있어 절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Q.한국국악협회 창원시지부, 하동지부와 같이 국악활동을 하시나요 A. 초창기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 창단 맴버였으나, 현재는 협회 활동은 하지 않고,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일을 하며 활동하고 있다. 한국국악협회 하동지부는 풍물놀이, 판소리, 한국무용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저변을 확대하며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Q. 하동에는 어떤 축제가 있나요. 그 축제에서 판소리를 많이 알리고 계시죠 A. 하동 송림 백사장과 섬진교에서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및 다리밟기 행사,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에서 산골 매실 매화 축제, 제17회 화개장터 벚꽃 축제, 하동군민의 날 기념식, 새해맞이 공연,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 등에 초청 받아서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Q.코로나 3년간 경창대회 치루시면서 힘드신 부분은 A.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법에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곧 적응이 되었고 큰 어려움 없이 대회를 치뤘다.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참가해주었다. Q. 20대 중반부터 쉬지않고 30여 년이 넘게 공적 국악활동 단체를 이끄시면서 힘드셨던 점, 보람이 되신 점은 A. 국악단체를 이끌어 간다는게 다른 단체도 그렇겠지만, 경제적으로 녹녹치 않아 어려움도 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단원들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슬기롭게 해결하며 걸어 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지역에서 후원자들도 차츰 생겨나면서 공고히 자리를 잡아가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Q. 국악발전을 위해 한 말씀하신다면. A. 우리 경남에는 대학에 국악과도 없고, 시립.도립 국악예술단체도 없다 보니, 국악발전에 악순환이 되고 있다. 특히 영남민요는 동부민요로 몰아가서 딱히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서울까지 가서 경기민요를 배워서 이수증을 받고 학원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렇게 국악발전이 타 시.도에 비해 열악한 현실을 못 벗어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원들과 창원시립 또는 도립국악단 창단을 희망하며 오늘도 묵묵히 걸어 간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을 통해 경상남도 창원 지역 국악 발전의 현황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 26회를 맞이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국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뒤에는 손양희국악예술단의 노력이 숨어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 받아서 이번 하동군과 함께 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국악명창대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가 된다. 손양희 2012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 200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한승호 '적벽가' 사사. 2005 대구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이명희 '흥보가' 사사 2020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성준숙 '심청가' 사사 경상남도판소리보존회장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총집행위원장(26회) 경상남도무형문화재 판소리전수관 외 다수 출강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 대표 (2016~2022) 동국대학교(한국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2005~2008) 마산창신대학교(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판소리 학사 및 석사 졸업 2017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2016 제24회 전국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16 제25회 땅끝해남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대상한국문화예술위원장상 2016 제19회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명창부 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15 제3회 미주 한국국악경연대회 '지도자상' 2006 제16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 2005 제2회 DELPHIC GAMES(문화올림픽) 한국대표(판소리) '단체우수상' 수상(말레이시아 쿠첸) 2003 제21회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최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00 제2회 여수 전남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우수상' 2000 제18회 광주특장부문 판소리전국대회 특장부 '우수상' 1995 제6회 대구 전국국악제 '금상' 1989 제8회 창원 고향의 봄 축제 전국민요경창대회 '장원' 1985 제30회 부산 영남무용제 '최우수상' 1979 제1회 영남지구 무용콩쿨 '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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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55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 팝 음악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국의 BTS는 국내 외 굵직한 정치적 이슈의 한가운데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소비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작금의 전반적인 문화적 지형에서 BTS는 이와 같이 존재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 올라선 BTS와 팬덤 아미의 관계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할 정도의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면서 문화적 사회 현상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실제로 2019년 "MAP OF THE SOUL: PERSONA” 앨범 발매 기자회견장에서 멤버 슈가는 BTS의 특별한 점이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 "특별한 팬들을 만난 게 우리의 특별한 점이 아닌가 싶다"며 아미의 특별한 점을 BTS가 성공한 이유로 꼽았다. 그뿐만 아니라 멤버 지민은 아미와 자신들은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생하는 관계라는 요지의 말로 팬덤 아미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내보였다. 참고로, "MAP OF THE SOUL: PERSONA”는 2019년 4월 12일에 발매된 BTS의 여섯 번째 미니 음반이다. 이 음반의 타이틀 곡은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이다. 이 작품에는 RM, 슈가, 제이홉RM, 방시혁 등이 참여하였다. 그뿐 아니라, BTS의 독특한 점은 인류 공통의 고민에 대한 공감과 위로, 그리고 격려가 메시지에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사람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려는 메시지가 전 세계 아미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BTS의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사랑’, ‘꿈’. ‘도전’과 ‘괜찮아’ 등인데 그 중 ‘사랑’의 의미는 남녀의 사랑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인정, 지지’를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이런 가사에 호응하고 환호하는 것은 이와 같은 메시지에 세계 아미들이 목말라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2018년 9월 BTS는 유엔에서 그들의 브랜드 메시지가 된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의 내용으로 다시 한번 연설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과 환호를 받았다. 이러한 BTS의 유엔 연설문은 학교의 수업 교재로도 활용될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묻고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BTS는 3년째 유니세프와 함께 ‘러브 마이셀프(LOVE MYSELF)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개최한 공연 수익을 자선 활동과 함께 기부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초청을 받는 유명 음악 그룹으로서 과거 비틀스의 영향력을 넘어선다는 평가까지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BTS의 파급력이 강력한 것은 아름다운 곡과 퍼포먼스도 한몫하고 있지만 더 큰 요인은 그들이 보내는 메시지 때문이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고 열정으로 도전하라는 BTS의 노래는 세계 청소년들을 향한 위로와 힘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며 늘 입에 붙이고 살아야 할 메시지를 음악을 통해서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메시지대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BTS를 보며 전 세계 BTS 아미들은 그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자존감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에서 자신감과 도전 의식이 생긴다. 『그릿』의 저자 앤젤라 더크워스는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한계에 낙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근원적 배경에는 전 세계 아미들이 서로 같은 불안을 공유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코로나19 이후 더 큰 빈부의 양극화를 불러왔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한 최초의 세대가 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우울한 시대에 BTS는 구원과 위안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하고 모든 좋은 투쟁과 눈물의 결과다…팬들의 에너지와 우리의 에너지가 만나서 아이러니를 극복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팬들을 이용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듯이, 여러분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BTS를 이용하라.” 미국의 「포브스」, 영국의 「BBC」, 프랑스의 「르 피가로」 등 세계 주류 언론은 BTS를 ‘21세기 비틀스’로 비교하고 수식한다. 이것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영향력 면에서 2020년대 BTS와 1960년대 비틀스가 닮았다는 의미이다. 이지영 교수는 "새로움의 측면이 아니라 공감의 측면이 포인트”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이지영 교수는 "BTS는 세대의 구분을 넘어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굉장히 보편적인 메시지를 말 한다”며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꾸준히 메시지를 전달한 진정성이 전달되며 메시지의 파급력이 더 커지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BTS의 건전한 메시지는 기성세대의 K팝에 관한 거부감을 부드럽게 완화시킨다. ‘우리 아이에게 소개해줘도 해롭지 않다’는 믿음을 지닌 중년층, 노년층 아미가 BTS 콘서트에 의외로 많이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동체를 통한 위로와 공감이라는 측면에서 아미는 일정 부분 종교의 순기능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지행 박사는 "아미의 활동은 나를 성찰하고 나의 변화로 주변이 1인치라도 좋아지는 열렬한 애정과 신념으로 나타난다”고 규정하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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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원 '세종 전국 국악경연대'를 개최하는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는 세종시(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생천길 76-7)에 10년 전 자리를 잡고 세종시 시민들에게 국악을 통해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의 공로를 기리며 다양한 문화 행사를 통하여 보훈의미를 널리 알리고 있다. 통일기원 ‘세종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올해 9회째 개최하고 있다. 다가오는 6월 보혼의 달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신영숙 회장에게 12일 단체 소개와 경연대회 성과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하였다. Q.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보훈선양'이라는 협회 설립 목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A.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는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의 공로를 기리며, 다양한 전통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보훈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국가에 공로를 쌓고 희생하신 분들을 우리는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이고 그것을 예술활동을 통해 알리고 기억시키고자 합니다. 또 본 협회가 문화예술활동에서 노력하는 부분은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의 일환으로 통일기원 세종전국국악경연대회를 올해 9회째 개최하였으며 전통문화예술인들의 명맥을 잇고 젊은 예술인을 육성하는 것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K-컨텐츠의 밑거름이 되는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Q. 올해 4월 개최된 '세종 전국 국악경연대회'는 개최 목적은 A. 통일기원 경연대회 목적은 국악발전과 보훈정신 발현입니다. · 한국전통문화예술 진흥 및 저변 확대 · 통일시대를 대비한 우수한 문화예술인 발굴과 육성 · 국가유공자 참여를 유도하여 국가관의 인식을 드높이기 위한 올바른 국가관 확립 Q. 경연대회 참가 자격은 A. 일반인과 전국 초·중·고교·대학교 재학생들은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대회는 판소리와 민요, 한국무용, 기악 등 개인전 부문과 민요·한국무용 등 단체전 부문, 민요·한국무용·기악 등 부문으로 진행됩니다. Q.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많은 참가자가 경연을 벌렸다고 하는데, 경연자 모집을 어떤 방식으로 하셨는지요 A. 이번 대회는 예선에서 코로나19로 비대면 영상심사 단심제로 진행했으며 명인·명창부, 일반부, 고ㆍ중등부, 초등부, 단체부로 나눠 열띤 경연을 펼쳤습니다. Q. 코로나 전후 경연대회 달라진 점은? A.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심사를 3년동안 진행하였는데 이리도 길게 상황이 이어질지 아무도 생각지 못했고 비대면으로 인해 현장성을 반영하기 못하는 부분에 많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무대 예술은 그 공간과 시간동안 많은 변수와 현장성을 발휘하여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영상에서의 제한적인 부분으로 진행하다 보니 아쉬움이 있지만 한편 장점으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먼 지역에서의 참가가 용이해지고 대회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이 덜해져 참가하는 예술인들에게는 보다 많은 기회제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Q. 대상을 받은 수상자는 A. 대상을 받은 서울예대 한국음악전공 한국음악단은 최무근, 박소연, 강진원, 김영윤, 여민서, 홍준서, 신승훈, 정연승, 이수빈, 장서진 학생으로 구성됐으며 이번 타악 팀을 지도한 김한복 교수는 우수지도자상을 받았습다.. Q. 역대 수상자 중 소개해주실 분은 A. 역대 수상자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분들이라 누구하나 꼽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대회에서 추구하는 바처럼 어린 새싹같은 국악인들이 해다마 늘어나고 초등부에서 중등, 중등에서 고등학교 진학까지 국악을 전공하여 다회 출연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국악을 전공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역량에 성취를 얻고 더욱 정진하게하는 촉매제를 주며 많은 국악인들을 육성하는데 이바지하는 기쁨으로 매년 대회를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Q. 올해 경연대회 수상자 중 소개해주실 분은 A. 올해 수상자 중 중고등부 종합대상으로 교육부 장관상을 받은 김세빈 학생입니다. 일반부, 명인명창부의 훌륭한 참가자와 수상자 분들이 계시지만 모두 직업으로 국악을 하고 국악계에 많은 역량을 펼치고 계시고 학생부는 아직 그 역량을 국악계에 펼치기 전이라 이번 수상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처음 보여주었다 생각합니다. 김세빈 학생도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느껴져 감사하고 이 수상을 자신감의 기반으로 삼아 앞으로 더 정진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습니다. 저희 또한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 발전하는 예술인이 되기를 바라며 꼽았습니다. Q. 한국보훈선양 예술협회에서 보훈의 날이나 국경일에 기념 행사를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 가장 기억나는 3·1절 기념음악회는 A. 2017년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세종국악원이 후원하는 3·1절 만세운동 기념음악회가 오는 3월1일 세종시 전동면 아람달 농촌 체험관에서 개최했습니다. 이날 음악회에는 대구 달구벌국악관현악단 등이 출연, 비틀즈 모음곡, 민요, 국악가요, 대중가요 등을 선보였습니다.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는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의 공로를 기리며, 다양한 국악 행사와 '통일기원 세종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보훈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내년이면 경연대회가 10년이 된다. 앞으로 '통일기원'이라는 목적을 구현하는 이 단체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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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 아동·청소년 연극단 ‘옥탑방달팽이’ 2기 배우 모집청각장애인을 지원하는 사단법인 사랑의달팽이(회장 김민자)는 청각장애 아동·청소년 연극단 ‘옥탑방달팽이’에서 활동할 2기 배우를 모집한다. 옥탑방달팽이는 청각장애 아동·청소년의 자신감 향상과 사회성 증진을 위해 사랑의달팽이가 창단한 연극단이다. 지난해 1기 청각장애 아동·청소년 배우들의 열띤 활동과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이번에 2기 배우 모집을 시작했다. 모집대상은 인공달팽이관 수술을 받았거나 보청기를 착용하고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초·중·고등학생이다. 사랑의달팽이는 자체 기준에 의한 심사를 거쳐 열정과 재기가 넘치는 10명의 청각장애인 배우를 선발할 계획이다. 올해는 7월말부터 8월초 사이에 창작 연극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이 일정에 따라 옥탑방달팽이 2기 배우로 선정된 청각장애 학생들은 4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에 연습을 진행하고, 5월부터 7월까지는 단원 간 일정을 조정해 주 2회 연습을 하게 된다. 연습 장소는 서울 약수역 인근의 사랑의달팽이 사무국이며, 연습 일정에 따라 장소는 변경될 수 있다. 접수기간은 3월 31일까지로, 사랑의달팽이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다운로드 받은 뒤 오디션 지원서와 지원영상 2개(자기소개·특기/지정대사)를 이메일로 제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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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소년재단, 제1회 더 뮤즈 청소년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한국청소년재단이 25일 오후 7시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구로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제1회 더 뮤즈 청소년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를 갖는다. 더 뮤즈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2021년 11월 4일 제주 토스카나 호텔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진행한 문화예술 교육지원 ‘미래로 이어지는 펀드’ 업무협약의 하나로 진행됐으며, 구로구청 및 구로지역 학교, 아동센터, 청소년 시설 등을 통해 추천받아 면접을 통과한 40여 명의 아동 및 청소년을 단원으로 구성해 2022년 1월부터 소규모 그룹 지도와 클래식 연주 및 창작 예술 등의 교육을 해왔다. 엘 시스테마 철학을 기반으로 해 음악을 배우고 싶지만 기회를 찾기 힘든 사회배려 계층 아이들에게 문화·예술 체험 활동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청소년들의 다면적인 성장을 지원한다. 이번 제1회 정기연주회에서는 ‘The avengers’, ‘도레미송’ 등의 유명 영화 OST와 베토벤 교향곡 ‘운명’, 드보르작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을 화려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선보인다. 금관5중주, 클라리넷·타악기 앙상블 무대를 구성해 다양한 형식의 연주를 즐길 수 있으며, 초청 게스트로 색소포니스트 송동건이 참여해 아름다운 연주와 함께 청소년 단원들을 응원할 예정이다. 정기연주회에 참가하는 청소년 오윤지 학생은 "처음 접해보는 악기이지만 음악을 배우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친구들과 가족 앞에서 연회를 가지게 되니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밝혔으며, 한국청소년재단 김병후 이사장은 "모양도 소리도 다른 악기들과 모두 다른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심히 준비한 연주회다. 부담 없이 오셔서 모두 즐기고 응원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더 뮤즈 청소년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는 한국청소년재단 주최 · 궁동청소년문화의집 주관·제주 토스카나 호텔의 후원으로 운영되며, 전석 무료로 진행되는 초대 공연으로 관람 관련 사항은 한국청소년재단에서 안내하고 있다. 한편 한국청소년재단은 1990년대 말 사회적 양극화와 함께 공교육에서 소외된 6만여 명의 청소년이 사회적으로 방치되고 있을 때, 10대 청소년들이 도시 속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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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파주 우리소리 전국 국악대제전(12/3)■목적 『 제10회 파주 우리소리 전국 국악대제전 』은 전통문화의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여 육성하고, 우리 전통국악을 실전에서 경험하고 소외된 국악인들에게 경연대회를 통하여 자신감 성취 및 타 장르 교류를 통해 학습기회를 마련하여 자긍심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함. ■일 시: 2022년 12월 3일 (토) 9:00~16:00 경연 16:00~16:30 축하공연 16:30~17:00 시상식 ■장 소: 파주시민회관 소공연장 (경기 파주시 시민회관길 33) ■주 최 /주 관 : (사)우리소리보존회 파주지부 ■후 원: 파주시, 파주시의회, 파주문화원, (사)한국예총 파주시지회, (사)우리소리보존회, 풀빛출판사, 어울무용단 ■경연내용 ○ 성 악 : 판소리, 병창, 민요, 가곡, 가사, 시조 ○ 기 악 : 국악기 전 분야 ○ 타 악 : 개인 및 단체 ( 4인 이상 ) ○ 무 용 : 한국무용 ( 전통 및 창작 ) ○ 경연시간 : 개인 - 3분 이내 / 단체 –8분 이내 ( * 참가자가 많은 경우 단축될 수도 있음 ) ■참가대상 :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 ○ 일반부 (19세이상) ○ 학생부 ( 초등부 / 중등부 / 고등부 ) < ※ 참가자는 필히 한복(공연복)을 착용해야 함 > ■참가신청 ○ 접수기간 : 2022년 10월 31일 (월) ~ 2022년 12월 02일 (금)까지 ○ 접수방법 : 온라인접수 - E Mail : pajusorichum@naver.com ○ 신청서 다운로드 : 붙임, (주)국악신문 www.kukak21.com ○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 1부 ○ 참 가 비 : 없음 ○ 고 수 비 : 50,000원 (미 대동 시) - 계좌번호 : 농협 356-0951-9303-23 / 예금주 : 김정희 (※ 당일 고수 접수시 혼잡하오니 11월 18일까지 참가자 성명으로 입금 요망) 심사규정 ■운영(심사)규정 - 참가 자격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일반인, 청소년, 단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단 본 대회 및 타 대회 장관상 이상 수상한자는 참가할 수 없다) - 본 대회 참가신청은 일 부문에 한해 신청이 가능하며 소정 양식에 준한다. - 각 부문 경연순서는 공개추첨을 하되 대회 진행편의상 집행부에서 임의로순서를정할 수 있다. - 본 대회 경연자는 경연순서를 준수하여 경연을 진행하되, 집행부가 인정하는 부득이한 경우가 발생한 경우 다른 경연자의 동의를 받은 후 경연순서를 바꿀 수 있다. - 반주자는 대동을 원칙으로 하되 고수를 동반 못할 경우 집행부에서 지정한 고수로 선택할 수 있다. ■심사회피제도 - 참가자는 직접 스승이나 8촌 이내 친인척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할 때에는 해당심사 위원의 심사 회피를 신청해야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아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었음이 발견될 시에는 본 대회 주최, 주관단체는 수상취소를 결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해당상장을 반환해야 한다. 참가자는 이 조항을 수락하고 참가하는 것에 동의하여야 한다. ■기 타 ○ 입상자로서 결격사유가 발견될 경우 입상자격 취소 ○ 지정고수가 필요할 경우 참가신청서에 명기○ 본 대회요강 및 시상내역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 시상내역 ■문 의 ○ (사)우리소리보존회 파주지부 010-4830-0937 / 010-3731-3073 최종 수정 일시 2022-11-28 pm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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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특별기획] 독서운동, 지역 삶을 바꾸는 거점되다(上)서늘한 바람, 높고 푸른 하늘이 주는 상쾌함과 계절의 변화는 독서 욕구를 자극한다. 때문에, 지역의 도서관 또한 이용자가 많아진다. 도서관은 개인의 독서를 위한 시작일 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 발전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현장을 들여다보았다. 지역 언론인의 진심, 청년이 터 잡는 ‘옥천’ 만들 것 복합문화공간 ‘청산별곡’/ 충북 옥천군 청산면 충북 옥천군 청산면 복합문화공간 ‘청산별곡’은 지난 10월 10일 개장했다. 말 그대로 책읽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학생들은 독서는 물론, 만화책, 보드게임, 웹툰 그리기, 영화관람, 자전거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옥천FM공동체라디오(2021년 개국, FM104.9Mhz) 제작, 유튜브 영상촬영, ‘청산별곡’ 신문 발행뿐만 아니라, 바리스타, 빵 만들기 교육 등의 진로체험이 이루어진다. 인구 3천이 조금 안되는(21년 11월 기준) 이곳 청산면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중심에는 ‘옥천신문’ 황민호 대표가 있다. 그는 2002년부터 옥천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부터 줄곧 옥천을 지켜온 언론인이다. 옥천군 중에서도, 외지에 속하는 청산면에 거주할 당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주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확인하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고자 했다. 인근 지역주민, 공무원과 함께 교류하여 자원봉사자를 꾸려, 청산초 야간도서관을 운영했고, 책읽는 사회문화재단과 한 언론사에서 공동주관한 ‘작은도서관 만들기’사업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황 대표는 여기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그 동안 지역(청산)에 대해 품었던 고민을 ‘청산별곡’을 통해 실현하기 시작했다. 청산면은 옥천군 9개 읍·면 중 가장 높은 인구감소율을 보이고 있다. 그는 청산에 야간 도서관까지 운영하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청산면에 약 150명 정도의 초·중·고 학생들이 있는데요, 이 아이들이 하교 후에, 갈 곳이 없어요. 또 시골은 불이 일찍 꺼집니다. 하교 후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고, 밤에 머물면서, 공부하거나 자유롭게 어른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지역을 아끼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야간 운영을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고, 사단법인 커뮤니티저널리즘센터(이사장 황민호)를 통에서 ‘청산별곡’ 신문발행, 지역 관련 유튜브 컨텐츠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위한 일자리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그가 ‘청산별곡’을 만든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소멸’이라고 하는데요, 지역의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 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살아요. 이 곳 청년과 청소년들이 더 이상 도시로 떠나지 않고, 지역에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더 많은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더 있고 싶은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활동(사업)의 가장 큰 기반은 주민들의 참여와 기부이다. 지역주민의 참여는 단순히 자금의 확보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황 대표는 외부 지원사업에 응모하여, 부족한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금 사정은 넉넉하지 못하여,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청산별곡’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독서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에너지를 발산하고, 배고프면 먹을 수 있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심리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면서, 애향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청년이 되어서 일터가 될 수 있는 ‘청산’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그는 이 외에도, 옥천 월간지 ‘월간 옥이네’, 예비사회적기업 ‘옥이네밥상’ 등 다양한 형태로 ‘옥천군’의 발전을 모색, 실천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소망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책 읽고 글 쓰는 모임 하고 싶어요. 지금 70-80대 어르신들 중심으로 할머니 기자단(옥천군)을 운영 중인데, 글 쓰고, 책 읽는 것 같이 하자는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또 학생들과(중·고등학생) 영화도 만들고 싶고, 라디오 제작도 하고 싶고, 기사도 쓰고 싶습니다.” 도서관 거점, 아이-어른 함께하는 생태마을 꿈꾸다. ‘죽곡농민열린도서관’ / 전남 곡성군 죽곡면 "책을 읽으러 도서관 찾아오는 주민들은 하루에 1-2명 정도예요. 농촌의 조용한 도서관은 효용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죽곡농민열린도서관’ 박진숙 관장은 농촌의 도서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때문에 그녀는 2014년부터 도서관장 활동을 시작할 때에도, 도서관을 교육문화, 돌봄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농촌 지역에서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교육 문화적 혜택이 거의 없습니다. 전남도교육청과 연계해서 ’마을학교‘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이 학교 밖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고, 주민들을 마을학교 선생님으로 구성해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2020년도 출범한 ‘함께마을교육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박진숙)을 기반으로 한다. 지역주민들로만 구성된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죽곡면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그 거점으로 도서관이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생태탐험’, ‘생태놀이터’, ‘운동회’ 등의 행사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이해와 애착을, 어른들(어르신들)에게는 아이들의 선생이자 지역의 어른으로서 자신감을 갖게 하여 아이-어른이 함께 하는 생태마을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박관장은 마을의 초등학교-도서관이 연계되어 정규수업으로 진행되는 ‘생태텃밭 정원수업’의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농촌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보다 흙을 만질 기회가 더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내 아이는 농사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들이 있으세요. 아이들이 1년 정도 토종종자 한 작물에 대해 책임지고, 수확하고, 씨앗 나눔까지 하게 되는데요, 뭔가 해냈다는 자신감도 갖고, 자부심도 생기게 되죠. 다음 해, 아이들은 ‘저는 옥수수 할래요.’, ‘저는 감자 할래요.’ 척척 알아서 합니다. 아이들이 농촌을 떠나야할 곳이 아니라, 대안이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요.” 특히, 곡성군은 전국 토란의 60%를 생산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지역의 특산물을 이해하고 키우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도서관 옆 텃밭에서 토란농사도 직접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이 토란들로 주민자치회 주최의 ‘토란도란 죽곡마을 축제’에서, 요리대회, '빨리깎기 대회' 등의 행사까지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학교-도서관이 연계되어 인근 초등,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생태텃밭정원’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는 ‘생태텃밭 정원 교사 양성과정’을 거친 지역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 박관장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말했다. "교사들 중에는, 도예가, 영상촬영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도 참여하시는데요, 최근에는 교사와 학생이 ‘생태영상팀’을 꾸려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농촌의 다양한 가치들을 알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생태 감수성 키워서, 지구 생태계 안에서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알게 하도록 하고 싶어요.” 고령으로 농촌의 일손에서 소외된 어르신들이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 할 수 있는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작은 운동회 행사 중에 ‘달려라 손 큰 부엌’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요리솜씨가 좋으시잖아요. ‘옛날 만드는 방식으로, 홍어를 무쳐달라고,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젊은이들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필요한 비용을 미리 드리고, 어르신께서 음식도 준비해주시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옛날이야기까지 하시면서, 재미나게 가르쳐주십니다. 설탕 대신 조청 쒀서 단맛 내고, 빙초산 대신 막걸리 식초 만들어서 사용하시는 옛 방법까지 소개하시죠. 아이들도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해요.” 박관장은 이 프로그램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어르신들 가지고 계신 귀한 재능 나눠달라고, ‘마을 선생님’이라는 지위를 드리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아이들 한 번 더 쓰다듬어 주시고, 아이들도 어르신들을 더 존중합니다. 서로 관계가 돈독해지죠. 지역 어른들이 교육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비용은 전남도교육청에서 지원하는 ‘마을학교’ 예산, ‘농림축산식품부 사회적농업활성화사업’ 지원금 등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협동조합원들과 함께 사업을 기획, 운영하고 있다. 박관장은 도서관과 협동조합의 사업의 가장 큰 뿌리를 교육에서 찾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착심이 없는 아이들은 겉돌면서 성장하거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경쟁에서 이겨서 빨리 떠나는 것이 목표가 되는 슬픈 현실로 이어집니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성장기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아이들이 지역을 이해하는 교육과정과 교사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함께 살고 있는 동네 언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해주시면서, 키워내는 과정을 정립하고자 합니다.” 책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단단해지는 마을 공동체 죽장선바위 독서동아리 :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고된 농사일을 생업으로 삼으면서도, 책읽기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경북 포항시 죽장면의 ‘죽장선바위 독서동아리’(회장 장성희) 회원들이다. ‘바위가 서 있는 동네’(선바위)라는 뜻의 ‘입암마을’. 실제로 동네에는 큰 바위가 서 있다. ‘바위처럼 우리도 우뚝 서는 모임이 되어보자.’ 하는 의미로 동아리 이름도 ‘죽장선바위 독서동아리’이다. 동아리는 작년(2021년)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장성희 회장 부부가 그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2014년에 귀농한 부부는 5년 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던 무렵, 죽장선바위 작은도서관 근무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았다. 국어교육을 전공한 장회장은 좋아하던 책을 접할 수 있는 일이라 지원했고 근무를 시작했다. 동아리를 만들 무렵, 장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여기는 도서관이 있어도. 농사일 하시느라 바빠서 도서관 오시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그중에는 책 가까이 하려는 사람 있거든요. ‘그런 분들과 동아리 만들어서 이야기 나누는 자리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남편이 먼저 제안했고, 저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죠. 책 빌리러 오시는 분들 통해서 회원 모집을 시작하게 됐어요.” 2021년 5월 10명의 회원으로 모임을 시작했고, ‘죽장선바위 작은도서관’에서 매달 1회 모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매번 새로운 책을 구매하는 것이 부담되어, 각자 읽었던 책을 추천하거나, 생각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남편인 권현구 회원이 2022년 ‘책읽는 사회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독서동아리 지원사업에 지원, 선정 되어 올해 6월부터 1년간 도서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도서 선정은 회원들의 추천과 협의로 함께 결정한다. 지난달에는 ‘단단한 마음공부/저자 서방스님’ 도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장회장은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불교 서적인데, 천주교 신자인 회원께서 추천하셨어요. 저도 종교가 없어서,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불교에 대해서 모르던 것도 알게 되었고, 마음에 깊이 남는 부분도 있었어요. 함께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면서 더 생각하게 되었고요. 말 그대로 단단한 마음공부가 된 것 같아요.” 연령층은 50-60대 후반까지이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사과농사를 짓지만, 오미자, 땅콩, 산딸기 등 크고 작은 농사에서 전통장 제조업까지 우리 땅에서 나는 다양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이들은 바쁜 일상에서도 새벽, 저녁 등 시간을 가리지 않고, 틈틈이 독서를 한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회원들이 주로 사과농사를 많이 해요. 농사짓는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을 하죠. 목적이 책도 있지만, 같은 동네니까 살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요. 사실 저녁에 사람들 모여서 나와 하는 것 쉽지 않은데, 한 달 만에 만나서. 인사 나누고 이야기 하면, ‘진짜 오길 잘했네.’ 생각해요. ‘오미자, 사과 농사 어떻게 해?’, ‘땅콩 키우는데 어떻게 해야 해?’ 농사정보도 교류하고. 모르던 정보도 알게 되고, 자식들 왔다 갔던 이야기도 하고요.” 이야기는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어떤 분은 마시는 차나 다른 음식들도 종종 가지고 오시는데, 한 분은 식혜 만든 것을 가지고 오셨는데, 함께 마시려고 종이컵에 식혜를 담았더니, 그 분이 환경운동 하시는 분이라 ‘종이컵 쓰면 안 되는데...’ 말씀하셔서, 자연스럽게 환경운동 이야기도 했어요.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교환하기도 해요. 이런 자리를 가능하게 한 책에 고마움이 크죠.” 지난 10월 14일(금)에는 ‘기린산방’의 저자 조혜전 시인과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특히 시인은 죽장면에 거주하는 주민이기도 하다. 동아리회원 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이들도 참여하여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장회장은 귀농한 지, 10년이 되어 가지만, 최근 뜻밖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귀농은 10년 정도 되었고,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해마다 힘들어요. 이번에 멧돼지가 들어와서. 밭에 콩을 네 번이나 심었어요. 여기 분들도 다 겪었던 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사방으로 망을 쳤는데도 뚫고 들어왔어요. 네 번째는 모종을 심어서 넣었는데, 안 파먹더라고요. 큰 것은(콩) 안 먹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연과 함께 하는 농사일이지만,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생리이기에, 농사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우리 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고마움은 한 층 더 크다. 장 회장은 동아리 모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소망을 밝혔다. "같이 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이 모임이 계속 유지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책으로 인해 만나기는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이 주는 행복이 정말 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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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명창 남은혜 성가 입증. ....공주아리랑 꽃피우다공주문화재단(대표이사 이준원)이 주최하는 ‘공주아리랑 꽃을 피우다’가 10월 14일 저녁 7시 30분 공주문예회관 소공연장에서 성료되었다.이번 공연은 지역공연문화 활성화를 위하여 지역의 역량 있는 예술가를 초청하여 진행되는 2022년 지역예술가 초청 리사이틀 네 번째 공연이다. 지난 2012년 유네스코에 등록된 공주아리랑을 전승하고 있는 공주아리랑보존회 대표 남은혜가 충청도를 대표하는 아리랑인 '공주아리랑'을 들려준다. 남명창이 성춘향과 이도령의 이별을 노래한 '출인가'로 첫막을 열었다. 관객과 2-3미터 정도 떨어진 무대에서 서로의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공간에서 주고 받는 소리와 추임새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 소리의 여정에 흠뻑 빠지기에 충분했다. 시작부터 남명창의 통성으로 불러준 경기소리 '출인가'는 자신감 있는 울림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사로 잡았다. 맑고 낭랑함이 잘 표현된 경기민요·한국전통춤의 기본 춤사위를 바탕으로 짜여진 '화선무' 등 다양한 국악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가무악이 펼쳐졌다. 국가무형문화재 전수자 김승애의 '십이체장고춤'과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이수자 정경숙의 강원도 정선지방 민요를 선보였다. 평소에 접하지 못한 공주의 특색 있는 '은개골아리랑'(작곡:이병욱)이 소개되고, 전통 춤사위로 흥을 돋우고, 경기민요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화려한 가무악 무대를 선보였다. 한 막이 끝날 때마다 큰 박수를 받았다. 풍류가 익어가기 시작하여 악사들이 연주하는 선율을 타고 나비처럼 가녀린 춤사위가 무대를 가르며 나르샤, 어느새 무대에서는 세군데 공간에서 3명의 예인들이 각각 펼치는 가무악으로 주고 받는 추임새에 신명이 실려서 남은혜 명창의 숨어있는 기량까지 뿜어져 나왔다. 휘날레 순서에서 이미 관객들의 표정과 숨소리에서 오늘의 공연이 모두가 만족하는 성공적 공연이 성료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막이 내려지자 많은 박수와 '앵콜'이 여기저기 쏟아져 나왔다. 남은혜 명창은 "공주아리랑에서부터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치르치크아리랑, 경기민요를 선보였다. 몇달동안 마음 조이며 이 무대를 준비했다. 이미 전석을 모두 예매 해주시고 응원을 해주신 공주 시민분들의 열열한 격려에 감사드린다. 경기민요와 예향의 고장 공주를 지켜오신 분들에게 충청도민의 아름다운 심성이 담긴 '공주아리랑'을 선사해드리고 싶었다." 며 "오늘 무대는 백제문화제 무대에 이어 10월의 3번째 무대에서 공주아리랑을 부른다. 향토민요 공주아리랑이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온 관객들은 "공주아리랑이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졌으면 좋겠다. 우리 애들도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워야만 커서도 부르게 된다. 학교 교육 차원에서 실시해야 한다."고 전했다. 공주아리랑은 남은혜 명창의 공주아리랑 음반 발표 이후부터 국내외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 유구, 의당, 정안, 계룡, 이인 등지에서 구전돼 오던 긴아라리, 자진아라리, 엮음아라리를 남은혜 명창이 공주아리랑 음반으로 내 놓으면서 공주 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편 남명창은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전국 민속조사 기록으로 남아있는 공주 지역 아리랑도 '금강아리랑'이란 곡명으로 내세워서 2015년 공주아리랑제 무대에서 발표했다. 남명창는 오늘도 공주아리랑 꽃을 피운다. 얼쑤! 공주아리랑 한편, 공주문화재단 지역예술가 초청 리사이틀은 지역예술가들에게 창작발표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공주 지역예술가들의 자생력을 강화하고 시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여 공주의 문화예술 수준을 향상하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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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국악대경연 현장(下)...........전통 잇는 젊은 국악, 이런 것!지난 경연에 이어 3일째, 마지막 단체 부문 경연. 경연자들은 모두 창작곡으로 도전한다. 각 팀별 대기실에서, 경연 준비를 서로 확인하거나, 경연곡 일부를 연습하며 맞춰보기도 한다. 한 팀이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팀은 구성원이 많을수록 더 다양한 악기들로 경연한다. 팀 구성원들은 대학 동기 재학생, 군악대, 중·고등학교 동문, 대학 동문, 대학 동아리 등 다양한 인연으로 맺어졌다. 어디서든 불러주세요, 저희 음악 보여드리겠습니다! 경연자들은 무대에 앞서 긴장과 행복이 교차하는 설레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에 차 있으며 진지했다. ‘E'space’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목표는 ‘KBS 뮤직뱅크’에 출연하는 거예요. 창작국악 그룹으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싶어요. 획기적인 무대와 활동, 자신 있거든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디서든 불러 주신다면 열정을 다해 저희 음악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작당’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대회 1등 해서, 우리 음악 해외에도 꼭 알리고 싶습니다. 국악이 가진 매력과 저희만의 음악적인 색깔이 합쳐져서, 저희만의 음악으로 세계인들과 함께 즐기고 싶어요.” 이들은 이미 자신들만의 음악적 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으며, 영향력 있는 국악 관련 단체로부터 창작 음악 활동을 위한 지원을 받고 있거나 다양한 대회에 출전 경험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팀들이다. 또한 국내 공신력 있는 창작국악대회를 찾아 지원, 출전하고 있을 정도로 창작 국악인으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누룽지’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저희 팀이 생각하는 전통은 단지 계승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음악도 전통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만의 또 다른 전통 만든다는 생각으로 음악활동하고 있습니다. 도전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이 대회에서 기대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기회 자체가 저희에게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출전 곡도 이 대회 출전을 위해 1년 전에 위촉한 곡입니다.” ‘O’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올해 정규 앨범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도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저(작곡자)는 서양음악을 전공했는데, 개인적으로 국악을 좋아해서 국악 전공자 분들과 팀 결성을 제안하게 됐습니다. 음악적으로 영화음악처럼 드라마틱한 전개도 있으면서, 국악, 서양음악 함께 조합해서 대중과 공감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또한 ‘KBS국악대경연’의 경우, 대중을 만나려는 젊은 국악인들의 요구와 방송사가 갖춘 인적·물적 자원과 맞닿아, 이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 음악, 그리고 국악 창작국악의 특징 중 하나가 국악 밖의 영역을 도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국악 밖의 영역이 국악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번 경연자들 중에, 서양음악 전공자도 상당수 있다. 전자 기타 연주로 단체 부문에 출전하고 있는 한 경연자의 소감은 창작국악이 음악적 경계를 허물며, 젊은 음악인이 국악으로 집결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O’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처음에는 국악이 생소하게 느껴졌는데, 그 생소하게 느끼는 것 자체가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짠하더라구요.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아서 시작했고, 서로 더 친근해지고, 국악을 더 진지하게 깊이 받아들이고, 이제는 새로운 음악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경연 시작 팀원들과 악기들로 무대는 가득 채워졌다. 조명은 더욱 세심해졌고, 경연자들을 향한 카메라와 마이크는 늘어났다. 경연자들과 악기들을 위한 무대 설치가 끝나고 경연이 시작됐다. 단체팀 최다 인원(9인)을 가진 팀의 음악은 무대를 꽉 채운 경연자들과 다양한 악기들로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곡의 정점에서, 진고(큰북)의 가슴을 치는 듯한 울림과 천하를 뒤흔드는 듯한 힘찬 소리(노래), 그리고 선율로 받쳐주는 현악기와, 타악기 등의 합류로, 모든 것을 삼킬 듯한 파도가 휘청이는 망망대해에 와 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듣는 이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느낄 정도다. 인터뷰 때 온화했던 경연자들이, 음악 안에서 때로는 질주하는 황소처럼, 때로는 들판의 순한 바람 같은 모습을 오가며 반전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전자기타, 드럼, 피아노와 함께하는 팀의 곡은, 후반부에서 ‘굿거리장단’을 연상하게 하는 강한 리듬과 사운드와 함께 장구, 드럼으로 곡을 주도하면서, 뒤이어, 북, 전자기타와의 색다른 조화로 감동을 극대화했다. 종묘제례악을 새롭게 해석한 곡 역시 인상적이었다. 소리(노래)가 곡의 중심축을 잡아가며, 가락에 화성, 템포를 가미하여 음악적으로 풍요로워짐은 물론, 기원의 간절함과 진정성을 더했다. 제목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하며, 시작하는 음악인들의 꿈과 포부를 한껏 담은 곡은 밝고 열정적인 그들 자신을 보여주었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리듬과 선율로 맑은 숲과 같은 신선함을 연상케 하면서도, 후반부 피리의 강한 음색은 극적인 감동을 주었다. 구성원 모두 가야금 한 가지의 악기로 도전한 곡은 조선시대 궁중연례 악곡 중 일부를 새롭게 재구성했으며, 가야금 고유의 고음에서 나오는 맑고 청아한 소리는 마치 맑은 물이 흐르는 숲 속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가야금이 가진 소리와 경쾌한 가락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의 음악은 마치 포장지부터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을 가진 선물상자 같았으며, 음악적 맛은 더더욱 다채로워 듣는 이의 영감을 자극했다. 전통곡을 기반으로 한 창작곡은, 어떤 느낌으로 해석했는지, 가슴을 울리는 대목에서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반추하며 작곡자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재미가 있었다. 순수 창작곡에서는, 그들이 깔아 놓은 음악을 보고, 만지며 더듬어 가듯, 완전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재미가 있었다. 10월 22일 결선에서(추후 변경 가능)는, 본선에서 순위를 가르지 않고 선정된 총 9팀이(부문별 3팀) 대상을 두고 열띤 경연을 벌일 예정이다. 결선에 오른 경연자들은 전문가 멘토링을 거쳐 한층 더 다져진 실력을 갖추고 무대에 오를 것이다. 제작진에 따르면, 결선 연주회에서는 무대 경연 장면 이외에, 예·본선 과정에 대한 영상과 최종 결선 준비과정에서의 선배들의 멘토링 영상, 경연 현장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참가자들의 자기소개 등을 담아, 시청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경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또한 ‘KBS국악대경연’ 유튜브 채널을 통해 경연 관련 다양한 영상을 업로드 할 예정이며, 연출을 맡은 정현경PD는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작년 수상자 인터뷰, 예·본선 과정의 모습과 인터뷰 등 각종 영상 등을 업로드해서, 단지 1위 수상자뿐만 아니라, 예·본선 참여만으로도 지원자들에게 큰 의미와 가치가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어느 경연자의 말처럼 지금 이 시대 음악이 전통국악과는 달라 보일지라도, 후대에는, 지금의 음악이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전승될 시대가 있을 것이다. 국악의 ‘전통 보존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이 안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고유의 것에 뿌리를 두고, 우리 음악을 향한 탐색과 함께, 지금 우리 삶이 녹아 있는 음악이라면, 시대의 색채를 더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 음악, ‘국악’ 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날, 기자는 젊은 국악인들이 그것을 해내고 있는 현장을 확인했으며, 그들의 미래와 함께 할 우리 국악이 어떤 음악이 될 것인지 진정으로 기다려지고 기대됐다. 10월 말의 결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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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 뜬 은하수(銀河水)‘미리내’ 한복미리내 ‘은하수(銀河水)’의 '제주도' 방언. "이곳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더위가 한창인 지난 9일 토요일 오후 인사동의 ‘미리내’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가진 공간을 찾았다. ‘미리내’는 직물에 천연 염색을 입혀서 한복 작품을 만들어내는 인사동의 의상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순간, 인공적 화학적 요소의 매염제를 배제한 천연염색 원료들로 물든 색감과 자연에서 가져온 옷감의 재질에서 뿜어내는 질감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깊이 있게 담백하며 명도 높은 색감에 음영만 더하여 멋스러움을 표출하는 작품부터 자연스럽게 물감을 뿌린 듯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은하수 빛 색감의 작품들까지......진열대에 걸린 의상들의 색깔과 재질은 모두 자연에서 찾아 온 작가의 고지식함이 드러낸 한복이다. 그러한 작품이 전시된 공간이 품질의 고급화를 추구하는 인사동의 ‘미리내’ 공간이다. 기존의 인공 염색 소재의 의복들과 대비하여 100% 자연 원료만을 고집하여 직물에 천연염색을 하는 ‘미리내’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인사동의 ‘미리내’에서 윤지영 선생님과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윤 선생님과의 일문일답이다. Q. 인사동에서 한복 의상실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원래는 20년 정도 해외를 돌아다니며 의류 도매로 무역하는 사업을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체력의 한계가 느껴짐과 동시에 언젠가는 개인 숍을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마음속에 한구석에 꾸준히 품고 있었다. 해외에 의류 도매를 하는 와중에도 한복에 관하여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인사동에 들어오게 되었다.” Q. 어떻게 ‘미리내’ 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가지게 되었나? A. "남편이 제주도 사람이다. 은하수를 가리키는 제주 고어 '미리내'라는 뜻도 좋고 매력 있는 이름이라서 선택하게 되었다." Q. 코로나 시기가 도래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텐데 인사동에는 어떠한 변화가 찾아왔나? A. "가장 큰 변화는 대부분 한복 의상실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Q. 인사동에서 한복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A. "기다림" …… "봄에 씨앗을 뿌려서 가을에 수확하듯, 잘 만들어진 한복이 제 주인을 찾을 때까지 나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Q. ‘미리내’ 한복의 맵시(실루엣)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A. " ‘미리내’는 어떠한 체형의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잘 맞도록 맵시를 유지하면서 주 연령대인 40-50대 여성들의 현실적인 단점은 보완하고, 편안함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다." Q. 천연염색만을 고집하는 ‘미리내’의 색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가? A. "덜 익은 떫은 감(풋감)에 의한 염색법인 ‘감물염색법’과 쪽이란 한해살이 풀을 염재로 사용하는 식물성 염색법인 ‘쪽물염색법’ 과정을 보통 10번 이상 거치며 햇볕으로 발색시켜 원단으로 사용한다" Q. 한복에는 부드럽고 섬세한 재료들이 많이 쓰이는데 어떤 직물을 주로 사용하는가? A. ”주요 작품에는 현대적이고 저렴한 합성 섬유, 레이온, 폴리에스터로 직조된 직물이 아닌 순수하게 합성섬유가 섞이지 않는 천연 재질의 원단만을 직조하여 고집스럽게 사용한다.” Q. ‘미리내’ 만의 디자인 철학이 있다면? A. "특별한 날 외에도 기성복과 함께 착장 시 생활에서 자연스럽고 이질감이 없으며 실용적이라는 인식되는 작품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시는 고객분들께 작품의 품질로서 확실한 믿음을 주는 것이다." Q. 최근 들어 한복과 더불어 한국 문화에 전반적인 논란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A. "우리가 스스로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엷고,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라져 가는 우리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을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고 본다." Q.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서양 복식의 형태를 본뜬 한복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A. "전통의 과도한 개량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 더 크다. 전통 한복의 기본적 본질을 무시하는 국적불명(?) 한복들은 단순 흥미 위주로 관심만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뿐인 한복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Q. 마지막 바라는 점이 있다면? A. "고객들과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스스로가 정한 '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내면적으로 유지하며, 누구나 만족시키는 한복을 만들어내는 것이 ‘미리내’ 의 바람이다" 한복은 오랜 세월 수많은 외세에 억압에 저항해 온 우리 민족의 삶과 닮았다. 그래서 한복은 한민족 공동체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전통유산을 지키고자 하는 힘을 키우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그녀의 철학이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세대를 이어 계승하는 고유한 전통이 사라지면 우리 예술과 문화의 정체성, 그리고 우리의 역사까지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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